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대중 납치 사건 (문단 편집) == 기타 == * 당시 용금호의 조리장인 조시환은 1994년 민주당 당사에서 양심선언을 하면서 비행기가 분명히 있었다고 했다. 또한 [[이후락]]의 인터뷰와 달리 호텔에서 발견된 유류품들은 당초 김대중을 호텔방에서 살해한 후 사체를 토막내고 피를 욕실 배수구로 흘려보낸 뒤 토막난 사체를 배낭에 담아 바닷속에 버리려는 목적이었음을 증명했다. 또 용금호에서 범인들이 한 행동과 말들을 종합해 보면 김대중을 수장시킬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 당시 공화당 정책위 부의장이던 [[이만섭]]은 김대중 납치 소식을 듣자 [[중앙당]] 기둥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면서 "이건 분명히 중앙정보부의 소행이다. 한때 대통령 후보였던 인사를 백주에 도쿄 한복판에서 납치하다니, 유신 정권도 얼마 못 가겠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 2014년 1월 21일 당시 [[민주당(2013년)|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정청래]]가 미국에서 당시 CIA 지부장이었던 그래그를 만나고 와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01&aid=0006712944&isYeonhapFlash=Y|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공개했다.]] 당시 필립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가 "김대중을 죽이면 한미 관계에 악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청와대로 들어갔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하비브 대사에게 "(김대중은) 곧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 전 주한 미국대사 [[성 김]] 부친인의 김기완[* '김재권'이라고도 불리며 [[창랑호 납북 사건]] 이후 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사가 여기에 관여했다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했기에 성 김도 완전한 [[미국인]]이 되었다. 여기에 관여하지 않았거나 미국으로 가지 않았다면 오늘날 주한미국 대사는 다른 이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오바마 행정부]]에서 한인 2세 최고위직 인사들이 박정희와 악연을 가져 미국 국적을 취득한 부친으로 인해 자신도 미국 국적을 가지게 된 점이다. 특히 성 김의 부친 김기완은 [[임택근]]의 매형으로, 즉 임택근이 성 김에게는 외숙부가 되며 김기완이 [[손지창]], [[임재범]]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손지창, 임재범과 성 김은 외사촌과 고종사촌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임택근이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와 거리 인터뷰하는 사진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어찌보면 권력에 들어갈 입장임에도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정권 치부를 잘 드러냈다고도 할 수 있다. 더군다나 김기완은 [[창랑호 납북 사건]]의 피해자였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납치 피해자가 납치 가해자가 된 아이러니]]이다. * 한국의 중정요원들이 불법적인 공작을 일본에서 벌인 것이 주권침해에 해당했기 때문에 [[한일관계]]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결국은 한국 정부가 김대중의 일본에서의 반유신투쟁과 통일운동 등의 활동을 문제삼지 않겠다는 약속을 일본 정부에 하고 무마되었다. 이 사건 해결을 위해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이 [[다나카 가쿠에이]]를 방문하여 직접 사죄하였다.[* 다나카는 금권주의적 정치가였으므로 이 사건에서도 어김없이 한국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 그런데 이후 소위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서 김대중의 일본 내 활동이 사형을 언도한 근거로 인용되어 일본의 반발을 살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전두환]]의 신군부는 판결문에서 이 부분을 삭제한 후 변조된 판결문을 일본 정부에 전달하는 기상천외한 조작극을 벌이기도 했다. * 2021년에 1973년 당시 뉴스위크 동경지국과의 인터뷰 육성이 공개되었다.[[https://youtu.be/m9xokEVAOyk|#]] 박정희 정권에 비판하면서도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발언했다. * 2020년 8월 12일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214/0001058123?sid=102|보도]]에 따르면 중정 내부에서 납치 살해를 반대하는 모종의 인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게 이상하지 않은 게 당시 중정에서도 이후락만 강력하게 작전을 추진했고 휘하 요원들은 전부 반대했던 걸로 알려졌다. 납치를 지시했던 총책임자도 당일 갑자기 종적을 감춘데다 미국 정보부에서는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던 걸로 봐선 내부에서 사보타주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 사건 당시 중정의 J차장보는 모처럼 여름 휴가를 얻어 [[춘천]]을 여행 중이었는데 김대중이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로 복귀하려 중정에 연락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후락]] 부장의 비서실장인 이 모씨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차장보가 급히 올라오면 오해가 커질수도 있습니다. 오지 말고 휴가나 며칠 더 보내세요. 연락망은 항시 유지하시고... 이 말에 J는 "이건 분명 (중정)국제파트가 저질렀을테고, 앞으로 뒷수습에 골치 좀 앓겠구나" 라며 대략 상황을 파악하고, 이후 포항, 남원, 전주 등을 돌아다니며 사나흘 정도 지난 뒤에 상경했다. 본의 아니게 휴가가 연장된 셈이지만, 곱씹어보면 뭔가 의미심장한 대목이기도 하다. * 당시 사건 직후 일본 총리에게 김대중의 신변안전 문제를 처음으로 거론한 인물이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 총리였다. 그는 특히 사건 직후 일본을 방문, 우려를 표명해 국제사회의 반향을 일으켰다. 이때 유럽에서 '김대중 구명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기도 하였다. [[https://chosun.app.link/ScamVxxBfzb|#]]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